사유 #1

사유 #1

2020-04-05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평소 산책을 즐기지 않던 나 자신이 오늘은 집 앞 강변가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오늘 점심무렵 부모님께서 다툼이 있으셨기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다툼으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꽤나 얼어붙었고, 나는 방 안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계속 읽고 있으면서 애써 이 분위기를 잊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차라리 밖에 나가 있는 것이 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사과의 의미로서 삼겹살 스테이크를 저녁으로 손수 준비하신 아버지의 두꺼워서 씹기도 힘들고 질기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드는 고기를 질겅거리며 씹다가 저녁을 먹고 오후 여섯 시 반 경에 산책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오늘 아침에 이미 어머니께서 계속 그렇게 집에 있는 것 보다는 밖에 나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면서 저녁에는 같이 산책이나 나가자고 하신 참이라서 그렇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개미’를 조금 더 읽다가 집을 나왔다. 자리를 피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강변에서 도대체 무얼 할 것인가라는 자연스러운 질문에 대한 준비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음악이나 약간 들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유튜브에서 다운받은 재즈 리믹스 음악들이 가득한 휴대전화와 이어폰을 집어들었으나 이윽고 핑계를 댄 것처럼 오랜만에 사색이라도 조금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책상 위에서 메모지 몇 장과 가장 좋아하는 델가드 샤프 한 자루를 꺼내들어 얇은 파카 안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을 나서게 되었다.


배우들의 선거

거리를 걸었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국회의원들의 선거 홍보 포스터와 현수막들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것들을 보니 문득 오후 일찍 읽고 있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제4권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것은 이러했다.

88.백과사전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배우들은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시늉을 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랑하는 시늉을 해서 사람들의 굄을 받으며, 행복한 모습을 연기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배우들은 이제 모든 직업에 침투하고 있다. 198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은 배우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고명한 사상이라던가 통치 능력 따위는 쓸모가 없어지고, 연설문을 작성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거느리고 카메라 앞에서 멋진 연기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 온 것이다. 사실, 현대의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정강 정책에 따라서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다(누구나 선거 공약(公約)이 종당엔 공약(空約)이 되고 말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현대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당과 정파의 지혜를 다 합쳐도 모자란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유권자들은 생김새와 미소, 음성, 옷맵시, 인터뷰할 때의 격식을 차리지 않는 태도, 재치있는 언변 따위로 후보자를 선택한다.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배우 같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우위를 점해가고 있다. 연기 잘하는 화가는 단색의 화폭을 갖다 놓고도 예술 작품이라고 설득할 수 있고, 연기력 좋은 가수는 시원찮은 목소리를 가지고도 그럴 듯한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배우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배우들이 우위를 차지하다 보니,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해지고 겉치레가 실속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 말할 때 눈길을 어디에 두는지, 넥타이와 웃옷 호주머니에 꽃힌 장식 손수건이 잘 어울리는지 따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토론에서 점차 배제되어 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나는 미련없이 그대로 그 배우들의 놀음이라 생각하기 좋은 산물들을 지나쳐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으로 가는 길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있다. 호수를 둘러가는 산책로에는 이제 꽃이 떨어지고 잎새가 나기 시작하는 벚나무가 있었고, 바람이 불어 벚꽃잎들은 바닥으로 흩날리고 있었던 차였다. 부모님 생각에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리고자 나는 그 벚꽃잎들을 바라보다가, 호수에서 바람에 일렁이면서 곳곳이 파원인 듯 전파되는 물결로 가득한 수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바람이 약해지고 강해짐에 따라 바뀌는 물결,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바뀌는 물결 전파의 방향, 가장자리에서 반사되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나의 과학전람회 연구를 생각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비행기 안에서 14시간을 잠을 안 자고 커피 5잔으로 버티면서 KESO 강의를 보다가 생각났던 주제, 연흔이 그 물결의 모양과 닮았다고 나는 순간 생각했다. 당연했다. 연흔의 생성 과정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곳에 연흔이 남는다면 어떤 모양일까?’라는 질문을 휘갈기기 위해 메모지를 꺼내어 샤프를 쥐고 손을 움직였다. 책상에 대고 쓰지 않고 바람 부는 공원에서 글자를 썼기에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충 휘갈겨졌다. 나는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번 과학전람회 계획서를 빨리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다. 오전에 손을 대려 시도했지만 나는 연구 방법에 대해서 조금 쓰고 이내 손을 들고는, 다른 짓들에 빠져 시간을 낭비한 탓이었다.


아쉬움이 떨어질 때

그러고 보니 나는 방학에 들어가고 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1달을 시간을 낭비하며 보냈었다. 정말 나란 인간은 신기하게도 집에만 오면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사용하고 싶은 욕구에 미쳐 날뛰기 십상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오늘은 꼭 정석을 펴고 수학 문제를 풀어야지, 대학 3개년 입시 문제 중에서 서울대학교 수학 이공계열 면접 문제는 오늘 A4에 전부 풀어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어떻게는 통제하기 위해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읽었던 그의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던 수첩을 응용해서 9가지 덕목을 만들고 그것을 플래너에 기록하면서 체크하려 했지만 그도 3일도 못 가고 컴퓨터를 켜서 쓸데없는 동영상을 보고, 게임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말았던 인간이었다.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입시’라는 거대한 경쟁에 스스로가 뛰어들었음을 자각하고는, 어떻게든 다른 친구들을 이기겠다는 이상한 욕심 때문에 이를 악물며 시간을 갈아넣으면서 정석을 풀던 나 자신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친구들에게 변명하면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려고 했던 나 자신이 집에 와서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때로 스스로의 이런 나태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내일은 꼭 오늘처럼 살지 말아야지 하며 다짐한 나는 다음날 무너지고, 때로는 그런 나 자신이 그동안 놀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노는 거지라고 하며 변명하기도 하며 나는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벚꽃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뒤에서 남자 아이가 뛰어왔다. 나를 앞지른 그는 석양이 지는 강변가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참이었던 것 같았다. 뛰어가는 그 남자 아이를 따라 하얀 푸들 종의 개가 달려가며 그 몸집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였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 때 꿈과 목표,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찼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과학자로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며 순탄대로를 달리던 나 자신은 고등학교 생활 1년만에 자신감도 없는 쭈글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남자 아이처럼 아름답게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떨어지고 있는 석양과 같은 존재로 달려가고 싶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나는 1년 사이에 그것을 잃었다. 스스로가 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어머니로부터 성적에 대해서 심한 압박을 받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던 나 자신은 1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 사이에 스스로의 진보에 대한 원동력을 상실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눈 앞의 즐거움을 쫓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계속 마음 한 켠에서 질문으로 남겨둔채, 나는 일상의 무료함을 쫓으려고 순간의 쾌락을 찾으려고 그렇게 의미없는 시간을 온라인 세계에서 보냈던 것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지난 1년의 시간은 나에게 자신감을 앗아간 것 이외에도 꽤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처음 접한 고등학교의 엄한 생활에 나는 심한 위기감과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것이 나의 사고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어느덧 ‘확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이른바 ‘무지’의 세계로 가져다 놓은 듯 하였다. 나는 현실에서 근원했을 것이라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에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여러 이른바 ‘쓸데없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다양한 글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관점들과 사상을 나는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빠르게 읽어가던 책들에게서 조금씩 멈추고 읽을 만한 구절들을 블로그나 공책 따위에 기록해놓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스파게티 면을 삶다가 완전히 면을 건지는 때를 놓쳐 물에 불어 터진 면들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서 참 먹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그런 몰골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고, ‘자신감’, ‘확신’으로 가득찬 지난 순간들이 모두 ‘모르겠음’으로 바뀌었다. 수과학에 꽤 자신이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맞닥뜨리면서 세상에서 처음 보는 점수를 맞아보았고, 나 자신보다 더 뛰어난 아이들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한창 치고 있었기에, 그러면서도 생활기록부에 들어가는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약간의 활동을 하고 그것들을 사실에 근본을 두고는 있지만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가면서 선생님들에게 내 생기부를 이렇게 써주십사하고 대략적으로 생기부를 나 자신이 써 내려가면서 부탁하기도 했고(학교에서 시키기는 했다. 한 학년의 100명의 학생들의 생기부를 모두 꼼꼼히 작성해야 하는 선생님들의 입장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근대 교육의 암울한 현실일 것이다.) 때로는 다른 아이들을 친구가 아닌 경쟁 관계로 보면서 철저하게 나 자신만을 위해 모든 인간 관계도 계산적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조심성없게도 그런 생각을 밥을 먹다가 무심코 입으로 뱉기도 했기에, 나는 도저히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뭐든지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끝없이 달려오며 ‘제발 꼴지는 면하게 해달라’라고 스스로 빌면서 달려온 결과는 나 자신의 예상과 이상하게도 우수한 성적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성적으로는 관련 영재교육 진흥법에 따르면 이 학교를 조기졸업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조기졸업해서 대학으로 나가라고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집에만 가면 게으름이 도지고 경쟁자들의 감시와 생기부를 작성하여 한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작살낼 수도 있는 선생들이 가득한 학교에서나 열심히 하는 연극 배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기에, 나는 조기졸업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주변에서는 저 놈은 성적도 되는데 왜 안 나가냐면서 미친 놈이라고 욕을 했다. 자기 자신들의 입시를 위해서 첫 번째 경쟁에서 승리한 너는 꺼져 줘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첫 번째 경쟁에서 나는 패배했다. 진정한 경쟁자는 주변 친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함, 수많은 나태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열심히 하겠다고 애걸복걸하면서도 스스로가 지성적으로, 수과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 발전하고 있다고 스스로가 느끼는 바가 없다는 여러 사실이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패배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패배자라고 생각하며 씁쓸함을 다졌다. 커피가 필요했다. 이런 경우 이성자 미술관 근처에 있는 경성 코페가 좋은 선택인 듯 싶었다. 얼마 전까지는 자주 먹던 카페 라떼는 최근 들어서 우유 맛이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길가의 벚꽃잎은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코로나 19가 창궐한 마당이라 공원에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얼마 전 가까운 윙스 타워에서 확진자가 나온 덕에 내가 살고 있는 진주는 다시 전염의 공포에 휩싸인 것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문득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이 시국 덕에 개학도 연기되면서 학교는 네이버 카페와 밴드를 통해 각종 공지사항을 남발했다. 그 중 하나는 문제의 조기졸업 및 조기진학과 관련하여 몇월 며칠까지 의사 변경을 하려는 사람은 다음 이메일로 양식을 제출하시오 – 라는 식의 공지였다. 중학교 선생님과의 몇 차례 면담, 그곳 교무실에서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 중학교 선생님들과 함께한 식사, 가족이 함께한 수많은 논쟁과 설전, 스스로의 고민, 결정 번복을 거친 끝에 나는 조기 졸업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일단 되는 것이니 한 번 시도는 해 보되, 영 아니다 싶으면 조기졸업 시험을 말아버리겠다는 심보였었다. 그 공지가 갑작스레 떠오르며 다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빠르면 1년 이내, 느리면 2년 안으로 대학생이 될 지도 모르는 나였는데 이렇게 집에서 한심한 시간을 보내며 놀고 있는 나 자신을 나는 끝없이 힐책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뭐가.


의문, 그리고 믿음과 구원의 필요 사이에서

2주 전 나는 나 자신이 18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꽤 괜찮은 인생 친구라고 생각하는 놈을 만나서 요즘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곁들여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 그것도 이제는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중학교 학생회 이야기를 다량으로 포함하여서 – 여튼 그 때 나는 그에게 그 당시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 그 혼잡스러운 머릿속에서 대충 건져내 그럴 듯 하게 끼워맞춘 다량의 좌반구의 변명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한 질문을 말한 바가 있었다. 그 질문이라 함은 ‘생각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가?’라는 것이었다.

그 2주 전의 질문은 그 날 공원을 걷는 내 머릿속에는 이런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 기괴한 질문과 나 자신에 대한 힐책이 기막히게도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그것은 또 하나의 혼돈이자 무지에 해당했다. 나는 걷고 있었다. 해가 거의 넘어가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카페인이 절실했다.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일이 떠올랐다. 몇 달 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 한 놈이 와서 나에게 포스트잇 한 장을 내밀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여기에 네가 왜 살고 있는지 좀 적어줘.” 그 때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즈음에 들던 생각들을 이리 짜집고 저리 짜집어서 그럴 듯한 한 문장을 그 포스트잇에 적고 도로 자습 중 씨름하던 수학의 정석 연습문제로 들어갔었다. 그 문제의 문장은 이러했다. “나는 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끝까지 믿기 위해서 살아간다.” 아,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생각이 든다. 그 때 나는 절대성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 인생 친구 놈에게도 설명했던 내용이 그 때도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절대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 자신이 모든 추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그러니까 ‘대화에서는 논리가 필요하다’, ‘과학은 인류 진보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 ‘수학이 진리다’와 같은 문장들, 그리고 ‘국가’, ‘타인’, ‘학교’, ‘교육’ 등과 같이 물질로서 구현되지 않는 관념들에 대한 절대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을 말한다. 인생 친구 놈에게 나는 이런 생각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말한 바가 있었다.

“어쩌면 ‘대화에서는 논리가 필요하다’, ‘수학은 논리 전개에 있어서 필수불가결 한 것이다.’, ‘수학은 중요하다’와 같은 문장들 – 나는 이들을 명제라고 말하고는 싶지만 말이지 – 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라.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 아니야? 생각해보자고, 일단 우리는 원시인의 상태로부터 진화와 발명과 발견,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한 살육의 끝없는 반복의 과정을 거쳐 우리가 오늘날에 도달한 것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들, 예를 들자면 ‘민주주의’, ‘과학의 중요성’ 따위는 역사책을 조금만 뒤져 보더라도 20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중요성이 덜했고, 그 이전에도 끝없이 중요성이 변화했단 말이지.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변해왔음을 알 수 있잖아? 이런 지식을 참고해볼 때, 그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진 그들의 행동과 뇌 용량을 생각해볼 때 오늘날, 그리고 과거를 지배했던 생각들은 처음부터 있었다기 보다는 역사의 흐름 속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공유된 것으로 생각하는게 보다 믿음직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것들은 원래부터의 절대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종의 과정을 거쳐서 절대적인 것으로 확립된 것일 게지. 그러면 그 생각들이 – 이제부터는 차라리 이데올로기라고 말할까? – 이데올로기들이 절대성을 확립받기 위해서는, 즉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나는 그것이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은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배성을 확립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그러니까 아마도 어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 그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 자체도 하나의 생각이고 그 생각 또한 그 권위의 원천이 그 생각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서 근원하므로 – 무의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즉, 내가 생각해보건데 이 세상에는 옳고 그름 따위는 애초에 의미가 없는 것이고, 생각과 믿음이 권위를 구성하는 게 아닐까?”

그 혼란한 대화 속에서 그 인생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 자신이 이야기하고도 이야기하면서 말이 정리가 된 탓에 별로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몇 주에 걸쳐서 이 이상한 문제를 고민할 시간이 있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내가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것들 – ‘과학’, ‘성실’, ‘공부는 성공의 어머니’, ‘노력의 중요성’ 따위를 모두 의심하고 그 절대성을 바로 폐기해버렸다.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은 단 하나, ‘허망’이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은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기피하기를 원했던 ‘허무함’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꼴과 다름 없었다. 다행히도 그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던 얼마 전의 나 자신이 둘러댄 변명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 또한 그 인생 친구와의 대화에서 커피 한 잔을 다 비워가던 중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모든 생각을 의심해버리다 보면 세상에 이게 맞다! 라고 하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단 말이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자신의 정신 건강에 별로 도움이 안 돼. 뭔가 믿을 것이 있고, 뭔가 신봉해 나가야 할 것이 있어야 일이 진행되는 듯 싶다고. 그러면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지? 어려운 질문이지. 내가 생각한 답은 이래.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자는 거야. 그 것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그냥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 살자고. 그러면 그 믿음으로서 자신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이고, 그 세계에서 – 어떻게 보면 허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스스로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방을 만든 다음에 자기 스스로를 그곳에 감금하는 꼴인 것 같기도 하지만 –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거지. 그게 다른 말로 하면… 아마 세계관 아니면 가치관 정도 되려나.”

그 말이 생각난 나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자는 데에는 아직도 이의가 없었다. 무언가를 믿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동기부여에는 꽤나 도움이 되는 것에도 별로 이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스스로의 문제점을 하나 더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지난 1년의 풍파에 나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이 희미해져 이제는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스펙타클했다. 쓰레기 짐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운전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소방관이 될 거라고 하기도 하고, 파일럿이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요리를 하겠다, 버스 운전을 해보겠다라고 꽤 자주 바뀌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과학을 접하면서 점차 그 길이 과학자로 굳혀졌다. 과학자의 카테고리 내에서 신재생에너지연구원을 희망하기도 하고, 화학자를 희망하기도 하다가 고등학교의 풍파에 완전히 꿈이 깨지면서 ‘지구과학자’를 꿈꾸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취미로 즐기던 얼마 안되는 정보과학 실력에 취하여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를 생각하기도 했다. 재미는 정보과학에 있으면서도 억지로 억지로 지구과학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하기도 하면서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의 꿈이 불투명해진 듯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디선가 나는 ‘꿈은 장래희망이 아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꿈은 무엇이었나? 직업을 가지겠다는 것도 하나의 꿈은 맞지만 그것보다도 더 원대한 목표는 무엇이었나?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얼마 전 2019학년도 2학기가 끝나갈 때 쯤 새로운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생각의 절대성을 의심한 이후 나는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을 믿자는 새로운 세계관을 설립하고, 그러면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 – 예를 들면 맹신으로 인한 오판 등 – 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계관들, 즉 생각들이 부딪히고 붕괴되는, 즉 접촉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어떤 생각이든 자유롭게 맞붙어보는 동아리를 만들겠노라 생각하고는 그 동아리 이름을 ‘알고보면 쓸데없이 신박한 잡소리꾼’을 줄인 ‘알쓸신잡’(인기 TV 프로그램 이름을 따와 끼워 맞추기는 했다)으로 짓고는 몇몇 친구들을 모으고 아래 학년에 모집 공고 게시글을 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동아리 체제에서 나 자신이 느끼고 있던 각종 불만들 – 이를테면 동아리 단체 티를 입고 미친듯이 다른 동아리들을 까 내리는 이상한 풍경, 동아리의 활동은 보지 않고 이름과 인맥과 명예를 염두에 두고 뛰어드는 동아리 선발 시험,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필요를 너무나도 강조한 나머지 비슷비슷하게 전개되는 동아리 활동들 – 을 모두 해결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쓸데없는 짓을 하자’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꽤나 간단하게 나왔다. 동아리가 터졌다. 같이 하겠다는 친구들은 관심을 조금 보이더니 이내 비정규 동아리로 운영하겠다는 나의 선언과 각종 이유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활기록부에 동아리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말을 끊었고, 아래 학년들은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끝없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얽히고 얽혔다. 나는 동기부여가 필요했고, 그 동기부여에 제격인 것은 믿음임을 알고 있었다. 믿음은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나는 생각했기에, 나에게는 믿음이 절실했고, 따라서 믿음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필요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저서 ‘개미’ 중에서 에드몽 웰즈라는 인물과 그가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등장시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다. 여기에 그 한 구절 전체를 옮기면 이러하다.

6.백과사전
또 당신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내 책의 두 번째 권을 발견했다는 얘기가 된다. 첫 번째 권은 지하 사원의 보면대 위에 눈에 잘 띄게 놓여 있을테지만, 이 두 번째 권을 발견하기는 그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쨌든 경하할 일이다. 당신은 정확히 누구인가? 내 조카 조나탕인가? 내 딸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가? 미지의 독자인 그대에게 먼저 인사를 보낸다. 나는 당신을 더 잘 알고 싶다. 이 책장들을 넘기기에 앞서 당신의 이름과 나이, 직업, 국적을 말해 주기 바란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가? 이런,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책장에 닿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그것도 기분 좋은 손길을 말이다. 당신 손가락 끝의 지문에서 나는 당신의 가장 내밀한 특성을 알아낸다. 지문은 당신 몸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거기에서 나는 당신 조상들의 유전자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 버렸더라면 당신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짝짓기를 한 끝에 당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신이 내 앞에 보이는 듯 하다. 아니, 웃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 주기 바란다. 당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다. 당신에겐 하나의 사회사가 담긴 성과 이름이 있지만 그것이 당신의 전부일 수는 없다. 당신은 71퍼센트의 물과 18퍼센트의 탄소, 4퍼센트의 질소, 2퍼센트의 칼슘, 2퍼센트의 인, 1퍼센트의 칼륨, 0.5퍼센트의 황, 0.5퍼센트의 나트륨, 0.4퍼센트의 염소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다 큰 숟가락 한 술 분량의 여러 가지 희유원소, 즉 마그네슘, 아연, 망간, 구리, 요오드, 니켈, 브롬, 불소, 규소를 함유하고 있다. 또 소량의 코발트, 알루미늄, 몰리브덴, 바나듐, 납, 주석, 티탄, 붕소도 가지고 있다. 이상이 당신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이다. 이 모든 물질들은 별들이 연소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 당신 몸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당신의 물은 흔하디흔한 바닷물과 다를 바 없고, 당신의 인은 성냥개비의 인과 한가지이며, 당신의 염소는 수영장 물을 소독하는 데 쓰이는 염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단순히 그런 물질들을 합쳐 놓은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하나의 화학적 구조물이며 훌륭한 건축물이다. 구성 물질들이 적절히 배합되고 안정되게 평형을 이루면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신을 이루는 분자들은 다시 원자, 미립자, 쿼크,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모든 것들은 전자기적인 힘과 인력과 전자의 힘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 절묘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각설하고, 당신이 이 두 번째 권을 찾아냈다는 것은 당신이 꾀바른 사람임을 말해 주는 것이고 당신이 벌써 나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첫 번째 권에서 당신이 얻은 지식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하다. 혁명이 일어났는가? 개혁이 일어났는가? 물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책을 더 잘 읽기 위해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바란다. 등을 곧게 펴고 호흡을 잔잔하게 고른 다음 입의 긴장을 풀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의 모든 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당신도 물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하루살이 같은 당신의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 당신의 삶은 막다른 골목으로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저마다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신이 내 글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는 구더기들의 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풀의 새싹을 무성하게 키워줄 비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세대의 사람들은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자취인 이 책뿐이다.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만 당신에겐 시간이 있다. 편하게 자리를 잡았으면 근육의 긴장을 풀고 오로지 우주만 생각하라. 그 속에서 당신은 그저 하나의 티끌일 뿐이다.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간다고 상상해 보라. 응애, 하고 당신이 태어난다. 흔해 빠진 하나의 버찌 씨처럼 어머니 몸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쩝쩝거리면서 당신은 수천 끼의 갖가지 음식을 먹어 치운다. 수천 톤의 식물과 동물이 이내 똥으로 변한다. 억, 하고 당신이 죽는다. 당신의 삶이 그런 것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덧없는 것 이랴. 물론 당신은 그런 삶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행동아라! 무엇인가를 행하라! 하찮은 것이라도 상관없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당신의 생명을 의미 있는 뭔가로 만들라. 당신은 쓸데없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는지를 발견하라. 당신의 최소한의 임무는 무엇인가? 당신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명심하라.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결과: 질문의 나무, 그리고 꿈

이러한 생각들이 뒤엉켜 낳은 결과는 생각 외로 간단했다. 죽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인생을 허망함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보다 큰 목표이자 믿음인 꿈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는가? 다르게 말하여, 어떤 문제를 나는 죽기 전에 해결해 볼 것인가? 답은 오래지 않아 발견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이라 함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서류를 제출할 때 있어, 자기의 목표를 소개하는 글을 쓰다가 대충 짜집어 지어낸 것에 불과했지만 나쁘지는 않은 생각인 듯 싶었다. 그 때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유 플랫폼 서비스였다. 나는 언젠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책에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한 젊은 해커가 모든 정보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대부분을 유료 서비스로 책정하고 잠궈 두었던 논문 사이트를 털어 논문들을 인터넷에 공개해버리는 일을 저지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행위가 범죄이기는 했지만 ‘모든 데이터의 흐름은 자유로워야 한다’라는 생각이 꽤나 괜찮다고 생각한 나는 논문과 관련한 공유 플랫폼 서비스를 하나 생각해냈다. 그 바탕은 간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보건데, 유명 논문 저널인 네이처라던가, 사이언스라던가 그런 저널들은 전문진을 구성하여 논문을 실어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이를 생각해볼 때, 이는 논문의 엄밀성을 생각할 때 괜찮은 절차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조금 비틀어보면 이른바 ‘권위자’들이 ‘비권위자’의 논문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므로, 그들 사상에 도전하는 것들을 밟아낼 수 있는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문제점은 결국 어떻게 보면 하나의 검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사상의 표현을 막아낸다는 점에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자유롭게 대립함으로서 새로운 사유와 생각이 탄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앞서 생각되었던 나의 세계관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권위자’의 심사가 없는 하나의 논문 공유 플랫폼을 생각해냈던 것이었다. 나는 어떤 논문을 제출하였을 때 그것의 신빙성을 소수의 ‘권위자’가 평가하기 보다는 다수의 연구진들이 평가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마치 최근 제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를 지껄이는 언론이 가끔씩 언급하던 블록체인 기술이 보안이 꽤 세게 구성되어 있는 중앙 서버가 거래 정보를 기록하고 감독하던 것에서 거래 정보를 다수의 컴퓨터에 분산 저장함으로서 조작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만든 것처럼, 다수의 연구자들이 다른 이들의 논문을 자유롭게 평가하고, 코멘트를 달고, 비판하고 논쟁하며 때로는 서로가 맞다고 싸우기도 하면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했었고, 그 생각을 실현하고 싶다고 자기소개서에 대략 지껄여놓았었다. 이런 과거의 사유가 떠오르면서 나는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의 저서에 있었던 하나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저서인 ‘나무’에 나오는 ‘가능성의 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대략적으로 나 스스로가 요약해 설명하기보다는 그 생각을 해낸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의 말을 그대로 빌리는 것이 보다 정확한 전달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아침에 나는 이런 일을 상상했다. 사회학자, 수학자, 역사학자, 생물학자, 철학자, 정치가, 과학 소설 작가, 천문학자 등 지식의 모든 지평에서 온 남녀들이 외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장소에 함께 모여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클럽>을 결성한다. 그 전문가들은 갖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지식과 직관을 결합할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무 모양의 도표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미래에 지구와 인류와 인류의 의식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표시한 수형도를 말이다. 그들의 의견은 서로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로는 그들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모든 전망을 도덕적 판단에 매이지 않고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축적된 전망들은 우리가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의 데이터 뱅크가 될 것이다. 그 나무의 잎사귀에는 이런 식의 가정들이 적히게 될 것이다.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 <만약 기상에 중대한 이변이 생긴다면>, <만약 지구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부족하게 된다면>, <자본가들이 인건비가 전혀 들지 않는 노동력을 얻기 위해 인간 복제 기술을 이용한다면>, <만약 우리가 화성에 도시를 건설한다면>, <만약 어떤 고기를 먹는 사람들 모두가 그 고기 때문에 똑같은 질병에 감염된다면>, <만약 우리 뇌를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만약 바다에 침몰한 러시아 핵 잠수함에서 방사능 물질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면> 등등. 그런 심각하고 중대한 가정뿐만 아니라 훨씬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가정이 적힌 잎사귀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 <만약 정년을 낮춘다면>, <만약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 <만약 자동차의 대기오염 허용 기준을 강화한다면>하는 식의 가정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거대한 나무에서 우리 종의 미래상을 보여 주는 가지와 잎이 계속 퍼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든 작업이 그 나무 그림 속에 온전히 반영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예언자>를 자처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들의 작업이 <미래를 예언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는 사건들의 논리적 연관을 보여 준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을 게 분명하다. 미래에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여 주는 그 나무를 통해서 사람들은 내가 <최소 폭력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떤 결정이 지금 당장에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피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실용적인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나무가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제가 이런 정책을 취하는 것이 당장에는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중대한 위기를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 대중도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들 자녀와 손자 손녀들의 이익을 내다보며 행동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처럼 환경 보호를 위해 반드시 취해져야 할 조치들이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최소 폭력의 길을 찾아내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대에게 살기 좋은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 그들과 정치적 협정을 맺게 해줄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굵기로 보나 높이로 보나 굉장한 거목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나무를 그린다면 매우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그림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는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법을 상상해보았다. 그 나무의 가지들을 낱낱이 그릴 수 있고 원하는 가지들을 따로따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말이다. 내 생각에는 체스 게임 프로그램의 엔진과 조금 비슷한 엔진을 이용할 수 있을 듯 했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최선의 응수를 찾아내는 체스 프로그램의 원리를 이용하면 인류가 나아갈 최선의 길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요인이 다른 모든 요인에 미치게 될 영향을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이라는 가정이 적힌 잎사귀가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이라던가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이라는 잎사귀에 간접적으로라도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나는 어떤 섬에 있는 거대한 건물을 상상했다. 건물 한복판에는 컴ㅍ터가 있고, 거기에 가능성의 나무라는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다. 컴퓨터 주위에는 강당과 회의시로가 휴게실 등이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거기에 와서 며칠씩 머물며 자기들의 지식으로 가능성의 나무에 물을 주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일에서 크나큰 기쁨을 얻게 되리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폭력을 방지하고 다음 세대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을 연구자가 누가 있으랴.

그는 이런 나무를 상상했었다.

그 두 가지의 잡념이 머릿속에서 엉키며 낳은 결과는 꽤 흥미로웠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성자 미술관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고 해는 떨어진 뒤였다. 나는 예전에 깨달음의 순간은 너무나도 광명깊어서 그 자리에서 그 기쁨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미쳐 날뛰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의 깨달음의 순간이라 칭할 수 있을 듯한 그 순간은, 마음이 갑자기 고요해지더니 그냥 무언가 심장 박동이 더 잘 느껴지고, 약간 먹먹하고 찡한 것이었다. 나는 ‘질문의 나무’를 생각해내었다. 이는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의 개미 제5권에 대략적으로 나오는 ‘개미 혁명단’의 작은 소사업과 비슷했다.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질문에 답을 한다. 누군가는 다른 답을 내어 놓는다. 그 둘이서 서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논리와 데이터를 들고 와서 격렬히 논쟁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유가 탄생하던가 승부의 판가름이 난다.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의 ‘가능성의 나무’와 좀 다른 부분은 ‘가능성’, 즉 if의 질문이 모든 의문사로 확장되었다는 것,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는 가능성의 나무를 기르는 정원사들을 소수의 전문가들을 외딴 섬의 건물에 맡기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나는 가능한 인류 전체가 참여하는 것을 상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이 ‘질문의 나무’가 그 유명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페이스북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다른 이들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른 이들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면서 안도를 느끼기도 하고, 여론의 선동과 다른 이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비슷하게 나의 플랫폼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성질이라고 생각되는 호기심이 그 원천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질문이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다른 이들의 생각을 접하고 논쟁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재구성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마치 니체가 주장한 위버멘쉬와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닐려나. ‘자기 초극의 의지’라는 것 말이다.

꽤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괜찮은 목표였다. 네이버 지식인과 QnA 게시판, 포럼 게시판을 극한까지 밀고 올라간 듯한 이 생각을 실제로 현실에 구현해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했다. 질문들이 브레인스토밍을 한참 진행중인 한 회의실의 칠판에 붙은 포스트잇들처럼 붙고, 그것에 대한 대답들이 또 붙고, 그것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그것들을 모아 생각하던 도중 새로운 포스트잇이 붙고, 몇 개의 포스트잇은 떼어지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신선한 시도가 될 듯 싶었고, 죽기 전에 한 번 매달려 볼 프로젝트가 되기에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보과학에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으니 이를 목표로 설정하면 나 자신의 관심사와 맥락을 같이 하는 바가 있으므로 재미있게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샛길, 목표, 계획, 그리고 혁명

이성자 미술관으로 가는 샛길로 빠진 나는 카페에 들어가 4,200원 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그러한지 <전메뉴 테이크 아웃 가능>이라는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밖으로 나왔다. 공원이 새단장된 뒤로 저녁의 몇 시간 동안 시에서 켜 주는 조명들이 들어와 나무들을 색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분홍색이었던 나무가 주황색으로, 주황색은 다시 노란색으로, 노란색이 녹색으로, 녹색이 청록색으로, 청록색은 다시 보라색으로, 그리고 보라색은 다시 분홍색으로. 회귀.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의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꽤 셌다. 파카 지퍼를 올렸다. 손이 약간 시린 듯 했다. 나는 갓 산 커피의 온기를 손에 전달하기 위해서 그것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쌌다. 그러곤 다시 걸음과 사유의 세계로 들어갔다.

꿈을 가진 자들은, 즉 목표를 가진 자들은 으레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나 또한 그런 관습에 맞추어 어떻게 내가 그를 달성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우선적으로 나는 학업에 더욱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수학이 더욱 그러했다. 머신 러닝을 코세라라는 온라인 강좌로 대충 훝어보고 있던 나는 선형 대수학과 각종 정리, 통계학에서의 각종 이론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아무래도 수학의 중요성을 꽤 느끼지 않았던가 싶다. 하지만 학업에 정진할 필요가 있었던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이유란 것은 두 가지의 생각들의 합으로서 등장했다. 첫째는 얼마 전의 일이었다. 몇 주 전의 일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우리 집의 식탁에서 야심한 시각에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가 계셨고, 나는 그 옆에서 안주를 조금씩 집어 먹고 있기는 했다. 무슨 일로 그런 논쟁에 진입했는지 나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중간에 있었던 아버지의 말씀은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그에 걸맞는 힘을 가져야 한단다. 어떠한 힘을 가지지 않고서 세상을 바꾸려해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아.” 둘째는 아까 총선 포스터를 보면서 떠올렸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의 그 구절과 관련된 또 다른 구절 하나였다. 그 구절을 그대로 아래에 옮기면 다음과 같았다.

82.백과사전
검열
옛날에는 정보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단순하고 노골적인 검열 방법을 사용했다. 체제에 도전하는 서적들을 간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검열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고 정보를 범람시킴으로서 검열을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이 오히려 한 층 효과적이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무의미한 정보들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텔레비전 채널이 늘어나고, 프랑스에서만도 한 달에 수천 종의 소설이 쏟아져 나오며, 온갖 종류의 비슷한 음악들이 어느 곳에너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혁신적인 움직임이란 나타날 수 없다. 설령 새로운 움직임이 출현한다 해도 대량 생산되는 정보들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결국 이 거대한 진창 속에서는 대중 매체가 만들어낸 상품들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상품들이 가장 인기가 있다는 점 때문에 마음놓고 소비한다. 텔레비전에서는 게임과 쇼, 문학에서는 자진적인 사랑 이야기, 음악에서는 <수려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단순한 선율에 담아 제시하는 사랑 노래들이 판친다. 과잉은 창조를 익사시키고 비평은 마땅히 이 예술적 범람을 걸러 낼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홍수 앞에 주눅이 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이 빚어내는 결과는 자명하다. 기성 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음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나는 내가 목표한 바를 정확히, 그리고 제대로 구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말씀도 맞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씨의 지적도 정확했다. 수많은 정보들과 이데올로기들이 흘러나오는 현실 속에서 나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대중 매체들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대중 매체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힘을 얻는 초입 단계는 입시가 분명하긴 했다. 나는 하나의 목표를 얻었고, 그것의 수단으로서 학교와 사회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하나의 혁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했다. 하나의 자만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질문의 나무’라는 생각과 그것의 가치에 모두가 동조해야 그것이 잘 구현되고 운영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수가 아닌, 인류 전체, 다수에 의해 구현되는 미래를 향한 전진. 이런 식으로 나는 생각했으니까.

혁명이란 무엇인가. 순간 떠오른 질문이었다. 언젠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나는 <설국열차>를 보았다. 선생님은 어떤 평론의 글을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씨네21>에서 나온 누군가의 해석이었다. 그 글과 선생님의 도움 자료들의 생각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던 것 같다. “혁명은 기차를 멈추는 것인가, 아니면 앞문을 따고 들어가서 기차의 기관차를 차지하는 것인가?” 작 중에서 이 질문은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문의 폭파를 두고 갈등하면서 고조된다. 커티스는 앞문을 따고 기관차에 진입하고 싶고, 남궁민수는 옆문을 따고 기차를 멈추고 싶어했다. 혁명에 관한 그들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나는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기차를 멈추는 것’, ‘기차의 기관차를 차지하는 것’이라는 것보다 보다 괜찮고 그럴 듯한 다음의 대답을 떠올렸다.

“혁명은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감동이라고 함은, 그의 몸과 마음이 바뀌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이다.”

반환점이었다. 나는 산책을 나갈 때 걸어서 왕복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다리까지 가기로 생각했었다. 커피 몇 모금을 마시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혁명에 대한 생각을 나는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관련된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과거의 내 주특기였던 자기 기만의 늪으로 다시 빠질 염려가 있었다. 나는 잠시 커피잔에 담겨 점점 식어가는 커피를 멀뚱거리며 보다가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 전으로 돌아가 나는 좀 더 깊은 질문이 없을까라고 생각했다. 내 ‘질문의 나무’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그것의 가치를 생각하면 다시 혁명에 대한 생각으로 빠질 수 있었기에, 나는 좀 더 본질에 다가가는 질문을 생각하다 이윽고 괜찮은 생각을 하나 해냈다.


호기심, 세계를 예측하고 싶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질문의 나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되는 호기심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이라는 것은 왜 생기는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왜 질문을 던지는가?”라는 물음이 있었다. 그 물음에 대하여 나의 양쪽 반구 모두 이상한 스파게티의 늪에서 이것저것을 들쑤시고 괜찮게 이어붙이다가 꽤 괜찮은 작업물을 하나 내어 놓는 듯 싶더니… 문득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또 국어 시간 이야기를 꺼내야 겠다. 예전에 국어 시간에 독서 토론의 일환으로서 몇 가지 책을 읽고 수업 시간에 논의하던 도중 들었던 대략적으로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항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 생각을 한다.” 나는 스쳐지나간 그 구절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 생각을 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은 어떻게 출발하는가?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 단순히 떠오르는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왜 굳이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인가? 수많은 질문들로 다시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그 중에는 이런 생각도 있었다. 이전에 했던 몇 가지 나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믿고 싶은 것 만을 믿으면서 스스로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논쟁을 통해 그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남의 세계관도 붕괴시키면서 서로가 각자의 세계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남의 공격에 대해 스스로가 변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방어한다…

“변명.”

어쩌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세계를 너무 강력히 구축하고 있는 나머지 너무나도 우리 뇌로 이해하기 힘든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의 내용과 다른 결과를 가져다줄 때면 실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라면 우리는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계를 저주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절망을 구렁텅이에 밀어넣어 열심히 채찍질하기도 한다. 야심한 밤 시각에 방문을 잠그고 좋아하는 음료 – 어른의 경우는 대부분 알코올이 포함된 것이긴 하겠지만 – 를 꺼내어 홀짝거리면서 눈물 콧물을 훌쩍거리기도 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붕괴되고 있는 세계의 고통을 덜어주는 모르핀 마냥, 스스로가 스스로를 향해 쏟아붇는 변명. 어쩌면 호기심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예측하고 싶고, 그 예측대로 세계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습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성자 미술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는 그 온기를 다해가고 있었다. 나의 사유도 종착점에 다다른듯 했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열기를 앗아가는 봄의 저녁, 강변 바람을 피해 저마다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세계를 예측하고 싶고, 그 예측대로 세계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습성이 있게 되는 것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한참 예전을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칼 세이건이 그의 유명한 저서 코스모스의 중간 어딘가에 기록해놓은 이야기와 비슷했다. 그 구절이 순간 생각났다.

이를테면 호모 속의 유년 시절, 즉 불이 처음 발견되던 때를 상상해 보자.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조상들은 별을 과연 무엇이라 여겼을까? 가끔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그 시대에도 틀림없이 살고 있었다고 상상한다. 이제 나의, 아니 그가 걸어온 상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우리는 열매와 뿌리를 먹고 산다. 나무 열매와 잎 그리고 죽은 짐승. 어떤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죽여서 먹는다. 우리는 어떤 것은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먹으면 위험한지 알고 있다. 어떤 것은 혀만 대도 죽는다. 그러한 것을 먹은 죄로 우리는 그냥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나쁜 짓을 일부로 한 게 아닌 데도 말이다. 어쨌든 디기탈리스나 독당근을 먹으면 죽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친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위험한 것들은 먹지 말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다. 사냥을 나갔을 때 우리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짐승의 뿔에 찔릴 수 있다. 짓밟힐 수도, 먹힐 수도 있다. 동물이 하는 일이 우리의 생사를 좌우하기도 한다.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떠한 자취를 남기는가? 짝찟는 때와 새끼 치는 때, 돌아다니는 때가 언제인가?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 둬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것들을 알려 준다. 그 아이들은 또 제 아이들에게 같은 사실을 전해 줄 것이다. … (중략) … 어떤 별은 하늘을 떠돌아다닌다. 우리의 사냥감들처럼. 그리고 우리처럼. 몇 달 동안 자세히 관찰하면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들처럼 그들은 모두 다섯이다. 그들은 별과 별 사이를 천천히 떠돈다. 만일 별이 모닥불이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별들은 커다란 불을 들고 다니는 방랑하는 사냥꾼들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가죽에 뚫린 구멍이 돌아다니는 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은 뚫린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구멍은 움직이지 않는다. 또 나는 자신이 불꽃의 하늘로 둘러싸여 있지 않기를 바란다. 가죽이 떨어진다면, 밤하늘은 밝아질 것이다. 너무 밝은 것이다. 마치 사방에 불꽃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되면 불꽃 하늘이 우리를 전부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늘에는 힘센 이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 있는지 모르겠다. 불꽃이 우리를 잡아먹기 바라는 나쁜 이들 그리고 불꽃이 우리에게 닿지 않도록 가죽으로 막아 놓은 좋은 이들. 이 좋은 이들에게 어떻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알아야겠다. 나는 과연 별이 하늘에 떠 있는 모닥불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별이 가죽에 뚫린 구멍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히 힘이 센 불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구멍인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어떤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또 다른 때에는 저렇게 생각하게 된다. 모닥불도 구멍도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 다른 것이라 생각했더니 모든 게 이해하기 너무 힘들어졌다. 통나무에 목을 대고 반듯이 누워 보자. 머리가 뒤로 졌혀진다. 그러면 오로지 하늘만 보일 것이다. 언덕도, 나무도, 사냥꾼도 안 보인다. 그저 하늘만 보인다. 어떤 때에는 하늘로 빠져 들어갈 것 같다. 만일 별들이 모닥불이라면, 나는 그 주위에 있을 사냥꾼들을 만나 보고 싶다. 방랑하는 자들 말이다. 그럴 때에는 하늘에 푹 빠져들고 싶다. 하지만 만약 별들이 가죽에 뚫린 구멍이라면 나는 두렵다. 구멍을 통해 하늘에 바져들어 힘센 불꽃 속으로 들어가기가 싫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모른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칼 세이건이 이 구절을 제시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그가 제시한 가상의 이야기에서 내 사유의 최종장을 찾아냈다. 원시인들은 왜 동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떠한 자취를 남기는지, 짝찟는 때와 새끼 치는 때, 돌아다니는 때가 언제인지 알아두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려고 했는가? 그것은 그들을 안전하게 사냥해서 그들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이 만일 별을 보다가 그들에게는 미지의 별을 검은 가죽으로 가려진 모닥불들이 뚫린 구멍으로서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 왜 그 가죽이 떨어지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된 것인가? 그들이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그들을 위협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질문, 그들은 왜 안전한 사냥을 통해 확보한 고기들을 먹어야 했고, 그들이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그들을 위협할까 두려워해야 했을까? 그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는가.

“생존.”

인간은 수많은 역사의 논증을 통해서 삶에는 한계가 있고 그 끝에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각종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아무래도 가장 좋은 도구로서 ‘호기심’, 그리고 ‘세계를 예측하고 싶다는 욕망’을 개발하지 않았는가 싶다. 어쩌면 믿음이라는 것도, 혁명이라는 것도, 인류의 역사 곳곳에 숨어 있는 수많은 생각들과 그들이 했던 행동 모두가 그들의 생존 욕구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일으켰던 농민들의 혁명, 왕을 끌어내린 공화정으로의 혁명과 같은 모든 혁명들, 인본주의, 민주주의, 과학, 수학의 각종 정리.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도구들, 그 모든 발명과 발견과 예견과 선지와 진보를 향한 갈망 모든 것들이 사실은 죽음으로부터의 공포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혁명을 통해서, 자연을 관찰하고 각종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서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하려고 시도하고, 각종 생각을 글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예술의 형태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신의 어느 한 조각이라도 세계에 남겨놓고 감으로서 계속 살아있을 수 있게 되는… 리처드 도킨슨의 주장이 떠올랐다. 부모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는 이유는 사실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아마 그렇게 함으로서 부모는 스스로를 세계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또 하나의 생존 방법은 아니었을까.


결론

잡념이 많았다. 커피가 다 식었다. 서둘러 그것들을 들이키고 쓰레기통을 찾았다. 헤메고 있던 차에 운동 나온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나를 힐책하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 전화는 진동 모드로 되어서 파카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전화가 왔다면 진동이 느껴졌을 것이 아니였겠는가.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와 아버지의 걱정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사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깊게 갔던 모양이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집중해본 것이,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생각에 집중해본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혼자 생각할 것이 좀 많았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생각한 것들 하나를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다.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요.” “이상한 놈.” 아버지의 대답이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옆에서 쓸데없는 짓을 몇 시간이나 붙들고 있냐며 나를 힐책하시는 어머니가 계신다. 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짓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며, 가장 쓸모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별로 없다. 아직도 두 분은 화해하시지 못하셨으며, 여전히 집안 분위기는 냉랭하고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예민하시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은 찾아냈다.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생각은 인간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미지에 맞닥뜨릴 때, 죽음에 대한 공포의 반사작용으로서 나타나는 호기심과 세계를 예측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근원하는 질문으로부터 탄생한다. 때로는 그런 생각들 중 몇몇이 많은 이들의 믿음을 얻는다면 권위를 얻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것이 1시간 30분 동안의 짧은 사유 – 그리고 그 전 부터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몇몇 질문들과 생각들에 대한 나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