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26. 교수(絞首) 앞에서의 변론(辯論)

사유 #26. 교수(絞首) 앞에서의 변론(辯論)

2021-07-24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 글은 필자가 2021. 7. 1.에 썼던 Chalkboard의 ‘교수(絞首) 앞에서의 변론(辯論)’을 Brunch에 올리면서 다듬은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어떤 약속의 철회와 교수법에 대하여


… 나는 솔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죄를 조금 더 덜 수 있는 방법이다.

사실 얼마 전에 나는 경거망동한 흥분 속에서 부적절한 판단을 내렸던 과거 나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자 중학교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입장을 번복했다. 어떤 계약에서의 입장의 번복이란 참으로 무거운 속성을 지녔으며, 그것은 전화기 너머의 선생님께 굉장한 실례가 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다.

선생님께 번복의 이유를 설명할 때에도 나는 서순을 잘못 제시하는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 실수란 첫 번째 사유로 내가 긴장되고 주변으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이 걱정된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것이 주되게 보이게 한 것이었다. 사실은 그보다는 둘째 사유인 아이들(후배들)에게 보다 솔직해지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번복의 전달을 마친 뒤 어머니께 이 사실을 고하자 첫 번째로 돌아온 것이란 비난이었다. 대략 700명의 학생 앞은 별거 아니지 않느냐, 거기에 선생님도 있어도 별 상관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모 학생은 했다는데 너는 왜 못하겠다고 하느냐 – 라는 복합적인 뜻이 담긴 비난이었지만 내가 뒤늦게 입장을 번복한 주된 이유는 사실 위의 둘째 사유였습니다 – 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결국 차갑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지 말라고, 네 그 생각에는 대학의 이름이라는 자만이 사실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쏘아붙이셨다.

…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 하겠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번복의 어느 편에는 대학의 이름이라는 자만이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째로 잘못 제시했던 이유 중에서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 어머니의 작은 기우에서 기원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실은 학부모와 학생 사이에서 비교적 내가 파급력이 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단언이란 상당히 비논리적이고 속단적인 추정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것이 바로 그 명백한 이유이다. 이것은 덧없이 명백해서, 나는 이것을 부정하면서 진실로부터 애써 도망치려는 비겁자와 같은 행위는 하고 싶지 않으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해, 분명히 명백한 사실 앞에서 나는 마땅히 이것으로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난 속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라도 다음의 문장을 중얼거리듯 소리치려 한다. 사실 내가 비난받아야 할 가장 정확한 부분이란 그것보다는 잠깐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봉사,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 봉사의 목적으로 행해지는 강연이란 그 목적이 분명히 그 아이들에게 있음에도, 사실 내가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이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여서 – 즉 나의 봉사 시간, 이 일의 확장성 등, 그러한 것들을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채로 고려한 것이어서 바로 이 부분으로 나는 가장 비난받아야 마땅했다고 말이다.

그렇다. 사실 이러한 나의 중대한 망각 지점,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잊어서도 그리고 시야에서 놓쳐서도 안 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명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진정으로 내가 아이들에게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모교 교장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제의대로, 700명이나 되는 대중과 수많은 선생님들이 너무도 큰 규모의 행사를 통해 나를 보게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자명하게도 아주 전형적인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 앞에 있기 때문에, 마땅히 말해야 하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들을 간접적으로라도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고전적인 교수 방법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 자신은 이러한 경우 고전적인 교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나 자신에게 또 하나의 죄가 되고야 말 것이며 이 죄란 최후까지 나를 따라다니게 될 것이 아주 분명하다.

몇 시간 지속되는 일방적인 강의, 그냥 앉아서 앞에, 그리고 그 사람에 집중하는 청중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에게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것들은 올바른 교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끼고 있지 않던가. 오래 전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적한 바가 있듯, 지식과 이야기는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교수해야 하는 것이지 나열하는 방법으로 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믿고 있는 것이다. 나열하는 방법으로 교수하는 것이란 교수(絞首)이지 교수(敎授)가 아니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이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전형적이고 싶지 않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인물로 남고 싶은 생각 또한 없다. 나는 이러한 끊임없이 나를 덮치는 죄의식 속에서, 나름의 회개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시도라도 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나는 솔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죄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