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50.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사유 #50.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2023-01-03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어른’ 김장하


이 글은 MBC 경남에서 제작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보고 든 생각들을 모은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1.

어릴 적 어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스물이 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른’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그 호칭의 무게에 걸맞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주변에서는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어른’이 아니겠느냐 하고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2.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저서 〈미니마 모랄리아 Minima Moralia〉에서 선물 아닌 선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 바 있다.

… 사람들은 선사하는 행위를 잊어버린다. 교환 원칙을 위배하면서 선물하는 행위는 사리에 어긋나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들조차 선물은 그들에게 솔이나 비누를 팔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미심쩍어 하면서 선물을 준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훑어본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자선, 즉 눈에 보이는 사회의 환부를 계획적으로 땜질하는 ‘관리되는’ 선행을 행한다. 이러한 조직화된 사업에는 인간적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기부는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 사무적으로 분배하는 행위, 간단히 말해 수혜자를 객체로 취급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모멸감을 준다. 사적인 선물 행위마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예산을 요리조리 따져보면서 되도록 남에게 신경을 뺏기지 않으려는 노력과 함께 수행되는 하나의 사회적 기능으로 전락해 버렸다. 진정한 선물 행위는 받는 사람의 기쁨을 상상하는 기쁨이다. 그것은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 즉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을 잊어버리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제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갖고 싶어하는 것, 사실은 그보다 조금 못한 것을 선물한다. 선물 행위의 타락은 선물용 목록을 고통스럽게 고안해 진열하는 것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이러한 고안 행위는 사람들은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 내심으로는 선물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이런 선물용 상품들은 그것의 구매자들처럼 공중에 떠 있다. … (중략) … 왜곡되지 않은 모든 관계, 유기체 내부에 있는 화해적 요소란 아마, 주는 행위, 선사하는 행위이다. 앞뒤를 재고 계산하는 논리에 의해 선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를 사물로 만들면서 얼어죽는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미니마 모랄리아 Minima Moralia” 中.

선물이란 남에게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서 주는 것이 아니던가. 타인에게 ‘주는’ 행위를 통해서 어떠한 효용이라도 얻으려 한다면 그 행위는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위란 일종의 구매 혹은 투자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아도르노의 지적대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선물 행위는 이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생각하여 ‘그를 위해’ 주는 행위가 아닌,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되어 버린지 오래되었기에,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선 행위도 하나의 선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장학금 등 각종 자선 사업에 뛰어든 이들 중에서, 기부 증서라던가, 기념 촬영이라던가, 정기적 모임, 감사의 편지 등과 같은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기부 행위를 자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종의 구매 행위이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은 구매하는 것이다. ‘존경’이라던가 사회적 ‘명망’ 따위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의 ‘치적’을 홍보하는 것에 그렇게나 일중하는 것이다. 그러한 선물 아닌 선물을 선물인 것처럼 포장하는 이들은 경멸받아 마땅하다.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당당하게 자본의 논리대로 ‘소비’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나로서는 훨씬 바람직한 행동으로 보인다.


#3.

나는 니체 철학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 깊은 부분으로 꼽는 것은 단언컨대 위버멘쉬(Übermensch) ― 즉, 초인(超人)이다. ‘뛰어넘는다’라는 의미 때문에 수많은 오해를 낳아 왔던 니체의 사상이지만, 나는 니체의 〈초인〉은 나와 타인 사이를 말한다기 보다는 나 자신의 ‘안’을 이야기하고 있는 개념이라 이해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초인〉 이란 소위 ‘긍지높은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을 갖춘 이, ‘타인’과 ‘사회’의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의식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사는 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아니던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마저도 성장으로서 끝까지 긍정할 수 있는 이가 ‘초인’이기 때문에, ‘초인’은 스스로에게 엄격한 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련 속에서 책임을 자신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돌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오직 올바르게 세운 이만이 따라서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외부적으로 강제된 도덕률에 의거하지 않고서도 스스로가 정한 기준과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

선물 행위는 두 가지 기본 전제가 충족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닐까. 즉,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면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선물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도르노의 지적을 수용한다면, 선물은 결국 ‘주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망각하면서 주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종종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주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는 분명히 하나의 ‘흔들림’이다. 자신의 흔들림은 결국 스스로에게 엄격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마땅히 책임을 질 줄 아는 당당한 니체의 ‘초인’만이 바로잡을 수 있으므로, ‘초인’이 아니고서는 따라서 선물을 주는 행위는 애시당초 성립할 수 없다.

한편 선물은 오직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때에만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지 않고서는 선물을 주는 것이란 불가능한 행위가 된다. 숙고의 대상이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 될 때에서야 진정으로 선물이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만을 위해 오직 베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업가이지 선물을 주는 이는 확실히 아닌 것이다.


#5.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란 곧 그가 살아온 삶, 그리고 그의 생각을 나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일 때에만 성립한다. 나 자신에 속하지 않은 것을 나 자신의 안으로 속하게 하기 위해서는, 즉 인간이 무언가를 알아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세심한 관찰과 주의가 필요하다. 이해의 대상이 자연물이라면 그것의 특성과 동작을 살펴보면 되지만, 이해의 대상이 자신과 같은 한 명의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하다 못하여 듣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서사에 빠져 있지 다른 이들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SNS와 검색 알고리즘의 보급은 한때 사람들이 자신과 공간적 ·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서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 바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기대한 것과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사람들의 서사를 분리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 듯하다. 지하철에서도 저마다의 작은 화면 속의 서사에 집중하기 바쁜 현대인들 속에서, 주변을 돌아보고 ‘나’ 아닌 사람을 살피는 이를 찾아보기란 이제 아주 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6.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나이는 확실히 ‘어른’에 대한 기준으로서 실격이다. 자연스럽게 ‘어른’이라는 호칭이 어울리게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한 행위를 많이 ‘하는’ 것인가? 박학다식하여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것인가? “어른 김장하”에 따르면 두 기준은 모두 옳지 못한 기준으로 보인다. 선물을 줄 수 있을 때에서야 ‘어른’이라 불릴 수 있음을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증명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마워 할 필요도 없고, 단지 지켜봐주었으면”이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도 “어른 김장하”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가 숨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