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14. 규약으로써의 예의

사유 #14. 규약으로써의 예의

2021-03-19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위선과 근대 인간, 그리고 언어에 대하여


“어쩌면, 제가 지금 웃고 있는 것도 예의라는 규약에 의하여 강제된 언어적 행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긴 하지만, 저는 언어라는 것을 전적으로 정보의 교환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저에게 있어 두 사람의 일반적인 대화 상에서 지켜지는 ‘선’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저 의사소통을 위한 약속된 하나의 형식인 것 같아요.”


상담사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오랜 시간 그 직업종에 있어 익숙한 것인지, 숙달한 경지인 것인지 표정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 상담사는 표정을 부드럽게 하면서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공감의 표시를 보였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 편안히 나를 응시하는 눈, 모든 비언어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기에는 다소 이상하고 위험한 사상(思想)일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심리적 상담의 본래 목적은 나 스스로를 파악하는데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시간을 내 준 상담사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었다.

… 이것이 일주일 전 금요일에 나 자신이 경험한 어떤 순간이다. 일주일 즈음 지나 나는 이상하게도 다시금 나 자신의 이 때의 발언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어찌 하였든 나는 ‘일주일 전의 나’의 발언을 조금 시간을 내어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시간을 내었다.


정보 전달, 언어적 행위의 목적

우선 ‘언어’라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전적으로, ‘언어’라는 행위, 혹은 상호작용에 대한 기계론적 시각을 나는 굳이 변경하고 싶지는 않았다. 즉, 나에게 여전히 ‘언어’는 둘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으로 정의되었다. 생각해보면, 일상 속의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사례들을 사려 깊게 따져본다면, 그 목적은 결국 정보의 교환이라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것 같다. 문(問)과 답(答),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음성학적’이나 ‘기호학적’으로 전달되는 언어적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적 통념에 그렇게 반하지 않으므로 대부분이 동의할 것 같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 대해서까지 ‘정보의 전달’이 본연적이라고 말하는 나의 주장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나의 주장을 옹호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 반례로써 떠오를 수 있는 상황 중 하나는 보통 ‘친목’이나 ‘관계’를 위한 의사소통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친구가 나 자신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잘 지내느냐”라고 묻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 통념 상으로는 이러한 상황은 ‘친구’가 나 자신과 ‘전화’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음성학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친구가 무언가 본인의 이익과 결부된 어떤 것들을 의사소통에 개입시키지 않았다면, 그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부르거나, 혹은 ‘도덕’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도 나 자신의 관점에서는 그저 친구가 ‘나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는 욕구’로 파악될 뿐이다. 나 자신은 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이러한 경우를 다루는 이론은 잘 모르지만, 경험상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별 다른 목적 없이’ 거는 경우는 문득 그 누군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냥 거리를 걷다가 예전에 지내던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서, 혹은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오래 전 알던 사람의 안부 – 즉, 그 사람에 대한 ‘현재의 상태’가 궁금하기 때문에 보통 전화를 건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의사소통의 목적을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일반적 통념은 무언가 부족하다. 생각컨대, 이러한 경우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건 목적은 ‘나 자신에 대한 현재 상태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고 진술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

다른 경우의 사례를 하나 더 들어 나의 주장을 조금 더 옹호해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유희적 행위 –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웃음과 같은 반응이나 감정선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일련의 농담이나 비상식적인 이야기, 혹은 기망의 언어적 행위를 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 통념 상으로는 이러한 경우도 ‘정보 전달’은 목적이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사람이 하는 농담에는 어떠한 유용한 정보도 전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별 과제를 위한 심도 있는 논의 중, 누군가가 분위기를 조금 끌어올리기 위하여 농담을 행한다면, 그 농담 자체에는 (일반적으로 뼈가 있는 농담이 아닌 이상은) 조별 과제에 대한 어떠한 연관성 있는 정보도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일반적 관점이 ‘농담이 나온 맥락’을 고려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일반적인 의사소통에서 갑작스럽게 ‘농담’이라는 행위가 행해지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한 가지의 사례로 이것에 대한 간단한 증빙을 보이도록 하겠다. 문학에서 우리가 ‘웃음’을 일으키는 문구나 기술들은 보통 그 목적이 ‘해학’ 또는 ‘풍자’에 있다고 말한다. 이 때, ‘해학’이나 ‘풍자’는 보통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도와 유사한 경우에 대한 상황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다소 과장하거나 축소하여 경우나 기술을 극단으로 몰아 이루어진다. 굳이 문학에서 해학과 풍자에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도를 도입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짐작하듯, 그 자체가 현실 상황에 대하여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괜히 복잡한 장치와 가정, 그리고 설정을 도입하여 문장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또한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을 그저 표면적 층위의 의미 자체로 읽어내지 않는다. 우리들은 문학 작품 너머의 의미의 층위를 짐작하고는, 이것을 스스로의 경험 세계와 결부시키는 작업을 우리도 모르는 중에 행한다. 그리고 이 작업의 결실로 우리는 어떤 영화, 또는 어떤 책이 ‘인상 깊었다’, ‘감동적이었다’라는 수식언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만약 그 말에 진심이 담겼다면 말이다) 일상적에서의 농담의 표현도 별반 문학과 목적론적 측면에서 다를 것은 없다. 우리가 농담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보통은 분위기가 어색하여 일련의 ‘반전’이 필요할 때, 혹은 무언가 의사소통의 전반적 흐름을 고취시키고 싶을 때 등이 있다. 이미 이 기술부터 짐작할 수 있지만, 농담이라는 행위도 결국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분위기가 지금 어색하다’, ‘분위기를 조금 더 고취시키고 싶다’라는 잠재된 의사가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희적 언어 행위들도 ‘정보 전달’의 목적이 없다고 속단할 수 없다. 이들 행위들은 결국은 은연 중에 복잡한 장치와 기교들로 본인의 현 의사소통 상황에 대한 의견이라는 ‘정보’를 싸서 전달하는 행위이고, 우리들은 이것에 반응하는 과정 와중에 자연스럽게 이를 수용하여 의사소통의 흐름을 변화하는데 가세하는 것은 아닐까.


예의와 언어적 행위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모든 언어적 행위는 ‘정보 전달’이 그 목적이다는 나의 명제는 어느 정도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주일 전 나의 이 ‘정보 전달’에서의 규약으로써의 예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흔히 우리가 예의라고 한다면 ‘사람으로써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살아가는데 있어 예의라는 것은 굳이 언어적인 것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는 것만 같다. 이를테면 유교적 문화권에서의 ‘웃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고 나서 먹어라’라는 꾸중에 담긴 예(禮)의 의식은 문자로 표현될 때 행위상의 경우도 아니며 음성학적으로 표현될 때의 경우도 아니기 때문에 별로 ‘언어적인 것’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통상적인 ‘언어적인 것’의 범주를 문자와 음성학적 표현으로 한정하는 경우의 해석일 뿐이다. ‘언어적인 것’의 범주를 조금 더 확장한다면 위 예시도 결국은 ‘언어적인 것’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의사소통과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언어적인 것’의 목적은 ‘정보의 전달’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앞에서 보였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기만 하더라도 이러한 정보의 전달에 대한 수단을 음성학적, 그리고 문자적인 것으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 행위적인 것 – 이를테면 이미지적인 것, 혹은 공감각적인 것까지 모두 정보의 전달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인정의 표시라는 제스쳐(gesture)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또, 누군가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의 얼굴이 불그레해지고 숨이 가빠진다던가, 혹은 표정이 일그러진다면 우리는 그가 기분이 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적인 것’의 범주를 ‘정보를 전달하는 모든 것’까지 확장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그리고 당연히, 앞에서 든 꾸중의 경우에 해당하는 행위에서의 규범에 해당하는 예(禮)의 경우도 당연히 행위가 ‘언어적’이므로 ‘언어적인 것’의 범주 안에 든다.

예의는 둘 이상의 사람 간의 모든 종류의 상호 작용을 규제하며, 둘 이상의 사람 간의 상호 작용이라면 음성학적, 행위적, 문자적인 경우 3가지가 전부라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의는 당연히 ‘언어적인 것’들을 규제하는 것이라 이제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일주일 전의 나 자신이 말한 ‘나 자신이 상담사를 향해 웃고 있는 것도 사실은 예의에 의해 규제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관점은 여전히 나에게는 옹호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한 가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면 과연 예의는 왜 발생한 것인가?”라는 다소 발칙하고 건방진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에 대한 많은 인문학자들의 가설이 있겠지만 나는 스스로 나름대로 생각한 일련의 한 가지 추론을 가지고 있다. 그 추론은 바로 ‘정보 전달’의 효율성 저해를 막기 위해 예의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바로 이 효율성의 저해가 ‘감정’이라는 요소에 결부되어 일어난다는 점과, ‘감정’이라는 요소는 ‘정보 전달’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 두 가지의 아이러니한 결합이 그것이다.

앞에서 논의한 바에 따르면 모든 언어적 행위의 본연적 목적은 ‘정보 전달’이고, 이 언어적 행위에는 일반적인 행위들까지 포함되므로, ‘감정’이라는 (얼굴 근육 등을 움직이는 등 신체적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도 결론적으로는 ‘언어적 행위’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므로 ‘감정’이라는 요소는 ‘정보 전달’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은 다소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또 다른 한 가지 흥미로운 요소인 언어적 행위에서 ‘정보 전달’의 효율성 저해라는 것을 조금 살펴보면, 이 ‘감정’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주된 원인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별로 먼 예시를 들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그저 친구와 대판 싸우는 상황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보통 나 자신이 타인과 다툰 경험들을 생각해보면, 이유는 보통 타인과 나 자신이 무언가 맞지 않아 상대방에게 ‘시정’이나 ‘개선’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언어적 행위의 목적은 ‘시정 혹은 개선의 요구’가 된다. 상대방이 이러한 요구를 다소 냉정한 태도로 침착하게 전달하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냉정하지 않은 태도로 자신의 ‘심리적 상황에 대한 정보’를 다수 포함하는 ‘분노’ 또는 ‘실망’이라는 감정을 동원하여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경우, 다소 이러한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보통은 오히려 그러한 감정이 역분사를 일으켜, 감정을 표현한 자에게 독이 될 뿐더러 그러한 감정이 전달된 자에게도 유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 의사소통의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고 다른 쪽으로 전체 흐름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경우, 본래의 의사소통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기타의 요소라기 보다는 ‘감정’이라는 요소를 집어 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것 이외에도, 예의라는 규범은 보통은 ‘감정’ 전달에 대한 규약이 많다는 점에서도 이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예의는 자신의 본래의 감정이 거세게 일더라도 보통은 인(忍)의 사상을 언급하며,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여야 한다는 규범적 기술이다. 타인과 의견이 충돌할 때 타인의 의견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우면서 상대방을 몰아 붙이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 토론에서의 ‘예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늘날 토론에서의 ‘예의’란, 의견의 충돌이 있어도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며 인정할 부분을 인정하고 반박할 부분을 기분 나쁘지 않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의는 ‘감정 전달’에 대한 규약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상의 논의는 예의와 감정에 관한 이상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오이디푸스>의 서사에서 오이디푸스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탄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를 범하여 자식을 낳은 근친상간의 비극과 비슷한 구도를 띤다. 예의는 감정으로부터 탄생하였는데, 그 자체는 정작 그 자신의 탄생 배경인 감정을 의사소통에서 제한해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그 이상한 아이러니의 결합이라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순간들이면 이상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의사소통에서의 규범이자 규약으로 이해될 수 있는 ‘예의’라는 것이, 전적으로 모든 의사소통의 과정을 지배하여 그 자신의 탄생 배경인 감정을 의사소통에 끼지 못하도록 제한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무언가 이상하다. 하지만 나 자신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는 부분은 응당 이것뿐만은 아니다.


‘가면’이라는 규약, 예의

일전에 나는 ‘동상이몽 #2. Masquerade’라는 글에서 ‘가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글이었다. 그렇게 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원래 의도한 바를 밝히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었는데, 이상의 논의로써 이제 나는 비로소 이 글에서 그 글에서 원래 의도한 바를 밝힐 수가 있게 된 것 같다.

나 자신이 그 글을 쓴 이유는 바로 ‘의사소통’에서의 ‘거짓성’을 꼬집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예의’라는 규범에 대하여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금 이상한 시각을 제시해보고 싶기도 했던 것도 있었다. 앞서 우리는 ‘예의’라는 규범의 ‘감정’에 대한 지배와 제한을 살펴보았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단어 선택에서 눈치챘겠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또 하나의 정보를 전달하는 ‘감정’의 기능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예의라는 것, 품위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을 나는 이상하게도 버릴 수가 없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에서 우리는 내면화된 ‘가면’을 흔히 쓴다. 이미 언급되었지만 예의라는 것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바는 본연의 감정을 숨기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가면을 예의에 구속되는 의사소통의 전 과정 하에서는 도무지 벗을 용기를 낼 수 없다. 그것이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전체적 의사에 반하여 낙인 찍히고 싶은 용기를 내는 것이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절로 인한 의사소통에서의 ‘이득’이 ‘손해’보다 많을 것이라는 점에서 나의 시각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글에서 다룬 영국 왕실의 사례를 본다면, 혹은 그리 멀지 않아도 되니 정치계에서의 그럴듯한 말들과 각종 스캔들에서의 거짓말, 그리고 규범을 둘러싼 이상한 갑론을박들만 보더라도 무언가 ‘숨김’을 강요하는 예의가 이상하게도 예상보다도 더 큰 ‘손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일주일 전 나’에 대하여

그러므로 예절에 대한 의심은 제기되어야만 한다. 물론 나 자신도 철저하게 원칙을 중시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행위적 역사를 보여온 만큼, 이러한 비판을 위한 자격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의에 대한 의심으로 얻은 관점의 변화는 그 이전에 비하면 너무나도 컸다. 일전에는 예의라는 것이 의사소통 상에서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으로 다가왔지만, 이제는 하나의 제한이자 규약, 약속의 시각으로 보인다. 자연히 예의에 대한 불가침성에 대한 생각이 정말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고, 시대에 맞지 않은 제도와 법은 우리가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절대성을 부여해온 예의라는 것도 만약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마땅히 폐지하거나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이제는 느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담사를 적지 않게 당황시킨 ‘일주일 전의 나의 발언’에 대하여 나는 이제 나름의 변론을 획득한 셈이다. 아마 나는 무의식 중에 나 자신이 속박되어 온 ‘예의’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싶다는 프로이트 관점에서 해석한 <오이디푸스>의 서사를 상담사에게 표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담사가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래도 적어도 나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지는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일주일 전 나’에 대한 최종 변론이자 나의 선고이다.